월리 비암 Wally Byam은 유년 시절부터 광활한 길을 달리고 야외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이런 열망으로 1929년 포드 모델 T의 섀시 chassis 위에 텐트를 쳤는데 이 사진이 어떻게 보면 에어스트림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리면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매우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 텐트를 눈물이 떨어지는 모양의 거주공간으로 바꾸고, 난로와 아이스박스를 설치하면서, 이 모습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아, 캠핑 트레일러 비지니스가 시작됩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월리의 앞마당에 있는 트레일러를 보고 '내것도 만들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서, 1931년 캘리포니아 쿨버 시에 작은 트레일러 공장을 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에어스트림의 첫 시설이었습니다. 당시 초기에 트레일러 제작업체는 50개를 넘지 않았지만 1937년까지 무려 400여개의 제조사가 생겨나며 명멸했지만 에어스트림은 아직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토르페도 torpedo가 이 공장에서 만든 첫 모델이었고, 1932년 초까지 약 1000대 가량 생산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습격 후,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미정부는 여행 트레일러의 여가 사용을 금지하고 더불어 알루미늄 사용도 규제하였습니다. 월리는 당시 에어스트림을 여행 트레일러로만 생각했지, 대용 주택으로써의 가능성까지는 생각치 않았기 때문에 공장 문을 닫습니다. 전쟁 동안, 월리를 포함한 회사 근로자들은 자연스레 항공기 제조사에서 경력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월리 비암도 전쟁 지원을 위한 비행기 제작에 도움을 주고자 커티스 라이트社에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그는 항공기 제조의 경험을 토대로 캘리포니아 공장 설비를 인수해 트레일러 비지니스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 당시 커티스 라이트 클리퍼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월리가 제작한 첫 번째 비행기 형태의 트레일러입니다.
1948년, 월리는 자기 친구 닐 벤더빌트와 함께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유럽을 방문합니다. 친구 닐의 목표는 순례 강연을 통해, 전후 유럽에 관한 영화를 찍는 것이던 반면, 월리의 목표는 여전히 에어스트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를 끌고 유럽 대륙을 횡단합니다. 월리는, 취약점을 발견해 개선하는 주행 테스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몇 년 후 시작하게 될 에어스트림 캐러밴 개발의 기초가 다져집니다.
1951년, 월리 비암은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텍사스에서 니카라과 Nicaragua까지의 여행을 계획합니다. 잡지사들이 이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하자, 그는 LA 타임즈에서 다른 사람들도 합류할 수 있도록 초대하였고 63대의 트레일러가 모이게 됩니다. 열악한 도로사정과 악천 후를 겪으며, 많은 캐러밴 여행객들이 중도 포기를 결정합니다. 오직 14 팀만이 완주하게 되어 월리는 다시는 이런 행사를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일 년 후 이 행사는 재개됩니다.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 하에 에어스트림은 점차 수 천 명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1952년, 월리는 서부 연안을 떠나 새로운 공장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동부로 여행합니다. 미 전역에 공급하기 위해선 미국 중서부에도 공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리노이 주 인디애나와 오하이오에서 여름을 보내며, 오하이오 주 잭슨 센터에서 공장을 짓기로 합니다. 에어스트림은 여전히 오하이오의 잭슨 센터를 연고로 트레일러를 만들고 있습니다.
월리 비암은 캠핑 트레일러에 개선을 이어갔습니다. 1954년, 그는 트레일러에 온수 시스템을 개발하도록 보웬 온수회사의 회장 마크 보웬을 설득하였고, 드디어 1957년, 에어스트림 인터내셔널은 창사 이래 최초로 ‘자급자족 형’ 여행 트레일러 개발에 성공합니다. 트레일러는 자립해 외부전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62년 7월22일 월리 비암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월리를 보좌하던 아트 코스텔로가 에어스트림의 새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1969년 인간이 처음 달을 방문하고 복귀한 이래, NASA는 에어스트림을 이동형 검역 시설로 특별 제작하였습니다. 달에서 돌아온 닐 암스트롱, 버즈 알드린, 마이클 콜린즈는 USS Hornet 항공모함에 마련된 특수 에어스트림에서 한동한 지내게 됩니다. 1969년 당시의 에어스트림 트레일러는 둥근 가장자리와 유선형 모양으로 변화하였고, 크기가 커지면서 고급스러운 내부를 갖게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석유 파동으로 자동차 산업이 위축되었지만 에어스트림 만은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에어스트림은 1971년 오하이오 주, 잭슨 센터에 근대적인 트레일러 공장을 새로 지었습니다. 150,000제곱미터에 이르는 크기의 이 공장에서 오늘 날까지 에어스트림을 대량생산하고 있습니다. 시설 통폐합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캘리포니아 공장은 1978년에 문을 닫았고, 모든 제조라인은 오직 오하이오 공장으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1974년 효자상품 하나에만 의존하는 것을 피하려는 리더십 아래, 아르고시(Argosy) 모터홈이 처음으로 출시되었습니다. 판매는 고만고만해서 생산은 1979년에 중단됩니다.
월리 비암의 죽음 이후, 여러 차례 운영진이 바뀌면서 에어스트림은 굴곡을 경험합니다. 1980년, Hi-Lo 트레일러의 소유주인 웨이드 톰슨과 피터 오트웨인이 Thor Industry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며 에어스트림을 합병하였습니다. 이 체재가 3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에어스트림의 우수한 품질 덕에, 세대를 거쳐 사용할 수 있는 내구성이 확인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에어스트림 빈티지 모델에 관한 관심이 일어나 복원과 개조 작업이 활성화됩니다. 이러한 요구에 1993년,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 모임 내에 빈티지 에어스트림 클럽이 생겨났습니다. 이 클럽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5년 이상 된 트레일러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에어스트림 트레일러의 주요 디자인은 1969년 이래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4년 30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디자인이 나타납니다. 폭이 5.5 인치 넓어졌고, 인테리어도 전반적으로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에어스트림 형태입니다. 1990년대는 새로운 여행 세대를 맞이하기 위해 젊은 구매자들의 기호에 맞는 사파리 모델을 출시합니다. 같은 품질에 경쟁사 대비 20% 저렴하며, 전통적 트레일러보다 20% 가벼워서 경차가 견인할 수 있는 혁신으로 에어스트림 판매의 거의 절반 정도가 사파리 모델로 바뀝니다.
2005년,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은 에어스트림 50주년을 자축하는 행사를 갖았습니다. 에어스트림을 몰고 창업자 월리는 유럽을 누볐고, 그의 친구 닐 벤더빌트는 아프리카와 중국에까지 여행한 바 있습니다. 월리 비암 캐러밴 클럽 인터내셔널(WBCCI) 역시 반세기 동안 동호인들을 결집하여 지속적인 유대와 추억을 나누고 있습니다.
2000년대 에어스트림은 베이스 캠프 트레일러 등 새로운 모델을 출시했습니다.
많은 모델이 명멸했지만, 품질과 혁신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은 듯 합니다.
이 열정이 바로 에어스트림이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네요.
*출처
(1) 블루버드, 에어스트림 코리아 https://www.airstreamkorea.co.kr의 내용을 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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